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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
“하루에도 몇 번씩 국가를 넘나드는 사람들, 그들이 사는 마을 이야기”
우리에게 '국경'은 국가 간의 분명한 경계이자, 여권과 통제가 필요한 선으로 인식됩니다. 하지만 전 세계에는 국경이 거의 의미를 갖지 않는 마을들이 존재합니다. 이런 곳에선 한 걸음에 나라가 바뀌고, 우체통은 A국에 있지만 문 앞은 B국일 수도 있죠.
이번 글에서는 실제로 국경선이 마을을 가로지르며 주민들이 경계를 인식조차 하지 않고 살아가는 장소들을 소개합니다. 정치적 경계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주민들의 삶은 그 선을 무시한 채 자연스럽게 흐릅니다. 경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이 마을들에서 국가란 무엇이고, 일상이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 바를레-헤르토흐 & 바를레-나사우: 집 안에도 국경선이 지나간다
벨기에와 네덜란드 국경에 걸쳐 있는 ‘바를레(Baarle)’ 마을은 전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국경 마을로 유명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벨기에 쪽은 바를레-헤르토흐(Baarle-Hertog), 네덜란드 쪽은 바를레-나사우(Baarle-Nassau)라고 불립니다.
이 마을은 단순히 두 나라가 맞닿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국경선이 실제 거리, 건물, 식당, 집안 거실을 가로지르고 있으며, 때로는 네덜란드 안에 벨기에 땅이 섬처럼 박혀 있는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른바 ‘엔클레이브(Enclave)’와 ‘엑스클레이브(Exclave)’의 복잡한 조합으로, 지도만 보면 퍼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일상의 경계
재미있는 사실은, 같은 건물 안에서도 국경에 따라 법이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레스토랑은 주방이 벨기에, 홀이 네덜란드에 위치해 있습니다. 불법인 네덜란드의 조례를 피하기 위해 벨기에 쪽 문으로만 손님을 들이는 ‘기지’도 있죠.
또한 이 마을에선 주소에 국가가 아닌 깃발 스티커로 구분합니다. 집 문 앞에 벨기에 국기 또는 네덜란드 국기가 붙어 있는 방식이죠. 경찰도 국경선을 기준으로 서로 다른 나라의 관할권을 적용받기 때문에, 같은 거리에서도 국가별로 서로 다른 법 적용이 이뤄집니다.
하지만 주민들은 이런 복잡함을 장벽이 아닌 자산으로 여기고 있으며, 이웃과 별다른 문제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국경은 통제보다는 다양성과 공존의 상징입니다.
2. 노보셀로-브레자비카: 유럽 속 ‘눈에 안 보이는 국경선’
코소보와 세르비아 사이의 국경 마을, 노보셀로-브레자비카(Novoselo-Brezovica)는 유럽의 현대사가 만들어낸 복잡한 경계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코소보는 독립국으로 인정받지 않는 국가이기 때문에, 많은 나라에서는 이 지역을 ‘세르비아 영토’로 보고 있지만, 현지에서는 코소보로 통합니다.
이 마을은 한 쪽은 코소보, 다른 한 쪽은 세르비아이지만, 주민 대부분이 알바니아계 코소보인이며, 행정적 소속도 혼재돼 있습니다. 문제는 국제사회가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코소보의 입장에 따라, 국경선이 형식적으로만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국경 없는 일상의 불편함
여기서는 공식적인 국경 초소가 없는 곳에서도 주민들은 자유롭게 이동합니다. 농작물 수확을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두 지역을 넘나드는 경우가 흔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마을에 공공 서비스, 우편, 전기, 통신 등의 체계가 이중으로 적용되거나 모호하다는 점입니다. 같은 마을에 있는 주민이지만, 어떤 이는 세르비아에서 전기를 공급받고, 어떤 이는 코소보 쪽 병원에서 치료를 받습니다.
이 지역에 사는 청소년은 코소보 교과서로 공부하면서도, 세르비아 학력 인증을 받아야 할지 고민하게 되며, 각기 다른 국가 시험을 준비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국가의 경계가 일상을 규정짓는 방식이 불분명한 곳에서, 사람들은 국경에 구애받지 않는 ‘실용적 삶’을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3. 로이타–오버비젠탈: 알프스 산골의 느슨한 경계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접경지대, 로이타(Leutasch)와 오버비젠탈(Oberwiesenthal)은 유럽의 국경 개념이 가장 느슨하게 적용된 마을 중 하나입니다. 이 두 지역은 알프스 산맥을 끼고 있는 고산 지대로, 자연환경이 험준하고 외부와의 연결성이 낮기 때문에 주민들끼리는 서로의 나라를 구분 없이 넘나들며 살아갑니다.
과거 유럽연합(EU) 이전엔 엄격한 출입 절차가 있었지만, 셴겐조약 발효 이후 사실상 국경 검문소는 철거되었고, 주민들은 아무 표시도 없이 도보로 경계를 넘을 수 있습니다. 어느 쪽 국경을 넘어도 언어, 문화, 음식 등이 비슷해 실제로는 국경의 존재감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서로 다른 국가, 하나의 마을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공식적으로 다른 법과 제도를 적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마을들에서는 공동 학교, 병원, 문화회관 등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마을 축제나 시장도 서로 협력하여 번갈아 가며 주최하며, 지역 방송도 양국 방송이 동시에 송출됩니다.
주민 중 다수는 한 나라에서 일하고, 다른 나라에서 거주하며, 통근 역시 별도 통행증 없이 가능합니다. 이런 환경은 국가라는 개념이 개인의 삶에 어떻게 다르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자주 언급됩니다.
🌍 결론: 경계는 '선'이 아니라 '관계'
국경 없는 마을들은 지리적으로는 국가의 경계에 놓여 있지만, 인간의 삶은 그 경계를 자연스럽게 넘나듭니다. 이런 마을에서 국가란 서류상의 존재일 뿐, 사람들의 삶은 더 넓은 관계와 일상 속에서 형성됩니다.
경계의 존재가 불편함보다 창조적인 공존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 그리고 정치적 경계보다 인간의 실용과 이해가 앞선다는 메시지는 오늘날 더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당신이 다음에 여행할 곳이 어쩌면 ‘국경을 넘는 삶’을 경험할 수 있는 바로 그런 마을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