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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
“국가의 기준은 무엇일까? 국기, 영토, 국민… 아니면 단 한 사람의 선언?”
세계는 유엔에 가입된 190여 개의 나라로 구성되어 있지만, 지도에는 없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자칭 국가들’도 수십 곳에 달합니다. 이런 곳들은 일반적인 국가의 조건을 갖추지 않았거나 국제 사회에서 승인받지 못했지만, 스스로 헌법을 만들고, 국기를 세우고, 여권도 발급하며, 때로는 관광객을 맞이하는 이색적인 ‘나라’들입니다.
이러한 ‘마이크로네이션(micronation)’은 단순한 장난이 아닌, 어떤 이에게는 정치적 메시지이자 예술적 프로젝트, 또는 사회로부터의 독립 선언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전 세계의 흥미로운 ‘1인 국가’들을 직접 여행하듯 소개하며, 국가의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1. 셀랜드 공국 – 바다 위 철골 구조물에 세운 해상 왕국
영국 동쪽 해안에서 약 12km 떨어진 북해에는, 수상한 철골 구조물이 하나 떠 있습니다. 원래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이 독일 공군의 침공을 막기 위해 만든 해상 요새(Maunsell Fort)였던 이 구조물은, 전쟁이 끝난 뒤 철거 대상이 되었으나 그대로 방치됐습니다. 그 철제 플랫폼을 점령하고 ‘독립국’을 선포한 이가 바로 영국 해적방송 진행자였던 패디 로이 베이츠입니다.
그는 1967년, 이 구조물에 올라가 자신을 셀랜드 공국의 국왕 '로이 1세'로 선포하고 국기와 헌법, 여권, 화폐, 우표를 제작했습니다. 로이 베이츠는 실제로 영국 정부와의 마찰도 있었으며, 아들의 결혼식을 이 구조물 위에서 치르기도 했습니다. 놀랍게도 그의 가족은 수십 년 동안 이 구조물을 유지하며, 셀랜드의 '왕가'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실제로 방문 가능한가?
셀랜드는 면적 약 550㎡(테니스코트 2개 정도)로, 주거 공간과 기계실, 감시탑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일반인은 쉽게 갈 수 없고, 극히 일부의 언론사, 연구자, 유튜버, 투자자만 제한적으로 방문을 허용받았습니다. 예전에는 방문을 위한 고급 투어 패키지도 운영되었으나 현재는 중단 상태입니다.
관광객 대신 셀랜드는 온라인을 통해 후원자를 유치하거나 시민권, 귀족 작위(남작, 백작, 공작 등)를 판매하는 비즈니스를 운영 중입니다. 실제로 30달러 정도만 내면 귀족 작위 증서를 받을 수 있고, ‘셀랜드 여권’도 만들 수 있습니다.
국제 사회는 셀랜드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지만, 셀랜드는 국제법상 영해 밖에 위치했다는 점을 들어 독립성을 주장해왔습니다. 실제로 1978년 외부 인물이 쿠데타를 시도했을 때, 로이 베이츠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침공에 대한 자위권 행사”라고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이 사례는 ‘국가는 물리적 규모보다 정치적 의지와 상징으로 성립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대표적인 마이크로네이션입니다.
2. 몰로시아 공화국 – 미국 속의 가장 유쾌한 자칭 독립국
미국 네바다주 사막 한가운데 위치한 몰로시아 공화국은, 외부에서는 그냥 조그만 시골 마당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곳을 방문하면 국기 게양대, 입국 심사소, 대통령 관저, 국립은행, 기념품샵이 정식으로 갖춰져 있고, 대통령 제복을 입은 케빈 보(Kevin Baugh)가 직접 안내해주는 진지한(?) 투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1977년, 당시 고등학생이던 케빈은 친구와 함께 상상 속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케빈은 성인이 된 후에도 그 꿈을 현실화해, 지금은 실제로 자신이 사는 주택과 마당을 ‘몰로시아 공화국’으로 선포하고 국가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몰로시아의 면적은 약 0.005㎢, 인구는 대통령 포함 가족 4~5명입니다.
국경, 여권, 세금까지 갖춘 국가 시스템
몰로시아는 농담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의외로 구성체가 굉장히 정교합니다. 헌법이 존재하고, 자국 통화로는 ‘바바(Bavah)’를 사용합니다. 이 화폐는 쿠키 반죽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이미 유쾌함이 넘칩니다. 입국 시 여권에 몰로시아 입국 도장을 받을 수 있으며, 대통령의 전용 관저는 ‘몰로시아 행정부 건물’로 안내됩니다.
몰로시아는 자국 웹사이트를 통해 법률, 역사, 전쟁 중인 국가 목록도 공개하고 있는데, 이 중 가장 유명한 항목은 “몰로시아는 여전히 동독과 전쟁 중”이라는 선언입니다. 이유는 "어릴 적 친구가 동독을 조롱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곳을 단순한 놀이로 치부할 수만은 없습니다. 케빈 보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국가주의의 허구성, 정치의 권위주의, 행정 절차의 과잉 등을 풍자하는 생활 정치예술 프로젝트로 발전시켰습니다. 미국 정부도 몰로시아를 특별히 규제하지는 않으며, 법적으로는 그냥 ‘개인의 사유지’로 간주합니다.
관광객은 미리 온라인 예약 후 방문할 수 있으며, 직접 ‘외교 사절단 체험’을 하듯 투어를 받을 수 있습니다. 몰로시아는 그 자체로 현실과 장난의 경계를 교묘히 넘나드는 풍자극이며, 현대 정치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살아 있는 퍼포먼스 국가입니다.
3. 아슬가르디아 – 인터넷과 위성으로 만든 우주 국가
2016년, 러시아 출신 오스트리아 거주 과학자 이고르 아슈르벨리(Igor Ashurbeyli)는 전 세계를 향해 새로운 국가의 탄생을 선언했습니다. 그것도 땅 위가 아니라, 우주에서요.
그는 인공위성 Asgardia-1를 발사하며, 이 위성에 담긴 디지털 데이터를 '국토'로 간주하고 세계 최초의 우주 국가 ‘아슬가르디아(Asgardia)’를 건국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아슬가르디아는 국제 정치와 지구의 충돌을 벗어난 중립적 공간에서, 새로운 인류 문명을 구축하겠다는 이상주의적 국가 모델을 제안했습니다. 실제로 이 프로젝트에는 초기부터 전 세계 과학자, 법률가, 철학자들이 일부 참여했고, 수개월 만에 100만 명 이상의 디지털 시민권 신청자를 모았습니다.
디지털 헌법과 의회, 온라인 정부
아슬가르디아는 홈페이지를 통해 헌법 투표, 의회 선거, 시민권 발급, 국기 디자인 공모 등 국가 운영 요소를 모두 온라인으로 구현했습니다. 시민은 이메일 주소만 있으면 누구나 가입할 수 있고, 일부는 연회비를 납부하며 ‘공식 시민’으로 등록됩니다.
아슬가르디아는 우주에서 인류의 거주지를 건설하는 것을 장기 목표로 하며, ‘지구 외 정치 실험’이라는 희귀한 프로젝트로 평가받습니다. UN이나 어떤 국가도 이를 인정하지는 않지만, 아슬가르디아는 “정치적 독립보다 기술과 윤리 기반의 공동체가 더 중요하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꾸준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가상국가가 던지는 메시지
아슬가르디아는 기존 마이크로네이션과 달리 물리적 땅이 없고, 전적으로 데이터와 인공위성, 온라인 기반이라는 점에서 완전히 새로운 실험입니다. 비록 현실적 영향력은 미미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미래 우주 거주민의 정체성, 디지털 시민권의 개념, 무국적자의 권리 문제를 제기하는 등 여러 정치사회적 담론을 촉진하고 있습니다.
즉, 아슬가르디아는 과장된 공상이나 유희가 아닌, 인류의 다음 거주지를 준비하는 철학적 실험장이자, '국가'라는 개념을 우주로까지 확장하려는 21세기형 마이크로네이션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마치며: 장난일까, 선언일까?
마이크로네이션은 단순한 놀이, 혹은 기이한 취미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안에는 기존 체계에 대한 도전, 주권의 재정의, 새로운 정치 실험이 숨겨져 있습니다.
누군가는 현실 정치에 대한 회의로, 누군가는 예술로, 또 누군가는 철학적 질문으로 ‘국가를 스스로 만든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죠.
국가는 국민 수, 군사력, 국제 인지도만으로 정의되지 않습니다. 셀랜드, 몰로시아, 아슬가르디아처럼 작고 사적인 선언이 전 세계의 관심을 끄는 것은, 어쩌면 국가의 본질은 결국 ‘신념과 이야기’에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