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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
미지의 종교 성지 순례기
“종교가 탄생한 장소, 그리고 지금도 조용히 신을 만나는 공간들”
세계에는 성스러운 장소가 많습니다.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 인도의 바라나시처럼 널리 알려진 종교 성지들이 수많은 순례자들을 불러 모읍니다. 그러나 그 너머에는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동안 전해 내려왔음에도 불구하고 널리 알려지지 않은 ‘숨은 성지’들이 존재합니다.
이들 대부분은 자연과 깊이 연결되어 있거나, 특정 종교 공동체 내에서만 비밀스럽게 전승되어 온 장소이며, 관광보다는 신앙과 체험 중심의 공간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세계 각지에 숨겨진 종교 성지 세 곳을 소개합니다. 이곳들을 순례한다는 건, 단순한 여행을 넘어 내면의 깊은 고요함과 마주하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1. 인도 라다크의 ‘헤미스 수도원’ – 티베트 불교의 북쪽 관문
히말라야 고지대, 인도 북부 라다크(Ladakh) 지역의 고요한 협곡 속에는 티베트 불교의 오래된 중심지 중 하나인 ‘헤미스 수도원(Hemis Monastery)’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곳은 해발 약 3,600m에 위치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고도에 위치한 불교 수도원 중 하나로, 13세기부터 약 800년 이상 수행과 전통을 이어온 장소입니다.
헤미스는 겉보기엔 단순한 사원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곳은 티베트 불교의 핵심 종파 중 하나인 ‘드루크파(Drukpa)’의 중심 본산으로, 수도승 200여 명이 실제로 거주하며 수행하는 살아 있는 성지입니다.
현장 체험과 전설
헤미스는 매년 6~7월경 ‘헤미스 축제(Hemis Tsechu)’라는 큰 불교 행사를 개최합니다. 이때는 수도승들이 마스크를 쓰고 챰(Cham)이라 불리는 의식 춤을 추며, 불살생과 자비, 번뇌의 소멸을 기원합니다.
이곳의 가장 흥미로운 전설은 ‘예수의 인도 방문설’입니다. 일부 기록과 전설에 따르면, 예수가 사라졌던 12세부터 30세까지의 기간 동안 이 수도원에서 티베트 불교를 배우며 수도했다고 전해지며, 이를 기록한 ‘예수의 생애 기록’이 이곳에 보관되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수도원 내에는 8m 높이의 마이트레야 불상이 있고, 불경과 티베트어 문서, 천장 가득한 만다라 그림들이 천 년 넘는 영적 분위기를 완성합니다. 숙박은 수도원 인근의 게스트하우스를 이용할 수 있으며, 오직 신발을 벗고 침묵 속에서 순례해야 하는 공간으로 운영됩니다.
2. 에티오피아 라리벨라 – 암벽을 파낸 지하 성당 도시
에티오피아 북부 고원 지대에는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기독교 성지가 있습니다. 바로 ‘라리벨라(Lalibela)’라는 도시 전체가 12세기 동굴 성당들로 이루어진 순례지입니다. 이곳은 암벽을 위로 쌓은 것이 아니라, 아래로 파내어 만든 지하 석조 성당들이 군집해 있어 세계적인 건축 경이이자 종교적 유산으로 꼽힙니다.
라리벨라는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중심지로, 오늘날까지도 이곳은 수도사와 신도들이 거주하며 실질적인 예배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총 11개의 성당이 지하에 조성되어 있으며, 그 중 가장 상징적인 건물은 십자가 형태로 조성된 ‘성 조지 성당(St. George Church)’입니다.
암벽 신앙의 삶
이 성당들은 망치, 정, 곡괭이만으로 수십 년 동안 암석을 깎아 만든 것으로, 마치 한 덩어리의 암벽에서 건물을 ‘꺼낸 듯’한 구조입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흙 속에 박힌 십자가가 보이며, 좁고 어두운 터널, 고대 문양이 새겨진 아치형 천장, 벽감 속 성상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헌신적으로 조성된 종교 공간임을 실감하게 합니다.
순례객은 성당 내부에 입장할 때 맨발로 걸어야 하며, 사진 촬영은 제한됩니다. 현지 가이드는 예배와 순례가 분리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동선을 유도하며, 관람이라기보다는 체험 중심의 침묵 순례가 이루어집니다. 또한 이 지역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매년 수만 명의 아프리카 내 기독교 순례자들이 찾아옵니다.
3. 일본 고야산 – 산속에서 머무는 불교 수행의 밤
일본 와카야마현 깊은 산속에는 1200년의 역사를 지닌 신비로운 불교 성지 고야산(高野山, Koyasan)이 있습니다. 이곳은 진언종(Shingon Buddhism)의 창시자인 구카이(空海)가 9세기 초 수행과 전법을 위해 개창한 지역으로, 지금까지도 100개 이상의 사찰과 4천여 명의 승려가 거주하는 산 전체가 하나의 ‘불교 도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고야산은 일본 내에서도 고요하고 폐쇄적인 분위기로 유명하며, 많은 수행자와 일반인들이 ‘일상에서 벗어나 나를 돌아보는 장소’로 이곳을 찾습니다.
템플 스테이와 정신적 고요함
고야산의 핵심은 숙박이 가능한 ‘템플 스테이’ 사찰입니다. 약 50곳 이상의 사찰에서 일반 여행자를 위한 숙소를 운영하며, 이곳에서는 수행자의 일과에 따라 정진, 아침 예불, 채식 공양, 좌선 명상, 불경 필사 체험 등이 이루어집니다.
숙소는 전통 다다미방으로 꾸며져 있고, 조용한 정원과 목욕탕이 있으며, 식사는 절제된 사찰식 채식(精進料理)으로 제공됩니다.
고야산의 하이라이트는 일본 최대의 묘지인 오쿠노인(奥之院)으로, 구카이 스님이 지금도 명상을 지속하고 있다고 전해지는 곳입니다. 묘역은 숲으로 둘러싸인 고요한 참배길로 이어져 있으며, 밤에는 수백 개의 석등이 켜지며 불교적 신비로움을 극대화합니다.
이곳은 종교인뿐 아니라 일반인, 외국인 방문객 모두에게 영적 평온함과 묵상의 기회를 제공하는 살아 있는 성지입니다. 일본 특유의 청결함과 정갈함,
그리고 현대와 격리된 듯한 정적은 누구에게나 깊은 울림을 남깁니다.
🙏 마치며: 종교란 믿음이 아니라, 공간과의 만남일지도
종교적 장소를 찾는 이유는 단지 신을 만나기 위함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그 공간 자체가 사람에게 정서적 위로와 새로운 자각을 주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소개한 헤미스 수도원, 라리벨라, 고야산은 잘 알려진 명소는 아니지만, 수백 년 동안 ‘그 자리에 있었던 시간’ 자체가 신성함의 증거가 되는 곳들입니다.
대규모 순례단과 기념품 가게 대신, 고요한 바람, 절제된 식사, 침묵 속 호흡이 중심이 되는 성지 여행은
당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보다는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를 되묻는 특별한 여정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