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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하나로 나뉘는 일상 - 국경 위에 놓인 마을 여행기

by 마루누나쓰 2025. 5. 5.

    [ 목차 ]

“현관문은 프랑스, 침실은 스위스. 한 걸음에 바뀌는 나라 속 삶의 이야기”
‘국경’은 우리에게 국가를 나누는 명확한 선입니다. 그러나 실제 현실 속에는 이 경계가 집 안을 가르고, 거리 한복판을 나누며, 시장과 교실을 둘로 나누는 마을들이 존재합니다.
이 마을들에선 한 걸음마다 국적이 바뀌고, 주민들은 두 나라의 법과 제도를 동시에 겪으며 살아갑니다.

이번 글에서는 세계에 실재하는 ‘국경 위의 마을’ 세 곳을 소개합니다.
그곳은 국경이 갈등이 아니라 공존과 조화의 상징이 되는 삶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하나의 도로, 하나의 이웃, 하나의 시장이 두 개 국가의 얼굴을 모두 갖는 마을들의 특별한 풍경을 들여다봅니다.

선 하나로 나뉘는 일상 - 국경 위에 놓인 마을 여행기
선 하나로 나뉘는 일상 - 국경 위에 놓인 마을 여행기

1. 네덜란드-벨기에 바를레(Baarle) – 가장 복잡한 국경이 있는 마을

유럽의 작은 마을 바를레(Baarle)는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국경이 얽힌 지역으로 유명합니다.
하나는 네덜란드의 바를레-나사우(Baarle-Nassau), 다른 하나는 벨기에의 바를레-헤르토흐(Baarle-Hertog)인데, 두 나라의 영토가 서로의 영토 안에 끼어 있는 섬(엔클레이브) 구조로 얽혀 있습니다.

이 구조는 중세 시기 영지 분할의 결과로, 오늘날에도 그 복잡한 국경은 실제 거리와 건물 내부를 관통합니다.
예를 들어 한 건물의 주방은 벨기에, 거실은 네덜란드에 속한 경우도 있고, 현관문이 속한 국가에 따라 세금과 법률이 달라집니다.

 

일상의 두 얼굴
이 마을에서는 국경선을 따라 국기 마크가 거리나 건물 바닥에 표기되어 있습니다.
주민들은 네덜란드 병원에 다니면서 벨기에 학교에 보내고, 쇼핑은 양국 통화로 모두 가능합니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는 한 가게의 왼쪽은 영업 가능, 오른쪽은 영업 금지라는 이색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관광객들은 이 마을의 특성을 체험하기 위해, 한 카페에서 두 개국 메뉴판을 동시에 보는 경험, 국경 위에 놓인 벤치나 침대에서 사진 찍기, 두 나라를 동시에 밟는 국경 스탬프 찍기 등을 즐깁니다.

바를레는 국경이 복잡한 만큼 갈등보다는 유연한 공존을 이룬 성공 사례로 평가받으며, ‘경계란 인간이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함께 조절할 수 있는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2. 인도-방글라데시 호르 모디 마을 – 국경 안의 또 다른 나라

인도와 방글라데시 사이의 국경선에는 과거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영토 분쟁이 존재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마을이 호르 모디(Hoor Modhi), 혹은 다할라 카가르바리(Dahala Khagrabari)라 불리던 곳입니다.
이 마을은 ‘국경 속의 국경 속의 국경’ 구조로, 즉 방글라데시 안의 인도 땅, 그 안의 방글라데시 땅, 다시 그 안의 인도 영토가 있었던 희귀한 사례입니다.

이 구조는 식민지 시절의 지주들 간 영지 교환으로 인해 생긴 엔클레이브-엑스클레이브의 반복 구조로, 주민들은 외교적 허가 없이는 집을 나갈 수도 없는 고립된 삶을 수십 년간 살아야 했습니다.

 

국경이 만든 고립
이 마을에선 농사를 짓거나 시장에 가기 위해 하루에도 3~4번 국경을 넘나드는 것이 일상이었고, 인도적 지원이나 의료 서비스도 국가 간 협의 없이는 도달할 수 없었던 구조였습니다.

2015년, 인도와 방글라데시는 역사적인 영토 교환 조약을 통해 이 구조를 해소했고, 호르 모디는 현재 단일 국적 아래 통합되었지만, 이 마을의 역사와 구조는 국경이 얼마나 인간을 고립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과거 국경선 표시 기둥은 지금도 남아 있어, 관광객들은 이곳을 찾아 ‘국경 미로’를 따라 걷는 체험, 마을 주민 인터뷰 프로그램, 국경박물관 전시(계획 중) 등을 통해 이 독특한 역사를 만날 수 있습니다.

3. 미국-캐나다 더비 라인(Derby Line) – 도서관을 기준으로 나뉜 마을

미국 버몬트주와 캐나다 퀘벡주의 국경선 위에 놓인 마을 더비 라인(Derby Line)은 하나의 건물, 하나의 거리, 하나의 도서관이 두 나라에 걸쳐 있는 매우 독특한 마을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하스켈 도서관과 오페라 하우스(Haskell Free Library and Opera House)입니다.
이 건물은 북쪽 절반은 캐나다, 남쪽 절반은 미국 땅에 속해 있으며, 도서관 입구는 미국에, 서가와 독서실은 캐나다에 있습니다.
실제 건물 바닥에는 검은 줄로 국경선이 그어져 있고, 한 건물 안에서 두 나라를 넘나들 수 있습니다.

 

국경이 곧 일상인 삶
더비 라인에서는 많은 가족이 국경을 기준으로 양국에 나뉘어 살아가며, 수십 년 동안 국경선을 넘어 일상 대화, 식사, 방문, 장보기 등을 이어왔습니다.

하지만 9.11 테러 이후, 그리고 최근 몇 년간의 국경 통제로 인해, 이전까지는 자유롭던 마을 간 통행도 철저한 감시와 제한을 받게 되었고, 사람들은 건물 안에서도 이동 방향에 따라 출입국 관리의 대상이 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마을은 지금도 두 나라 주민 간의 연대와 교류의 상징으로 작동하며, ‘국경 없는 커뮤니티’를 위한 교육 및 문화 교류 프로그램이 활발히 운영되고 있습니다.

 

🚧 마치며: 선이 아닌 삶을 중심에 두는 마을들
국경 위의 마을들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국가는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할까, 삶이 국가를 넘어설 수 있을까?”

바를레에서는 복잡한 선이 조화를 낳았고, 호르 모디에서는 분쟁이 일상의 무게로 전환됐으며, 더비 라인에서는
하나의 책장이 국가를 나누지만, 독서의 감동은 국경을 초월했습니다.

이 마을들은 모두 국경이 경계가 아닌 연결의 가능성으로 기능하는 곳입니다.
앞으로도 이런 마을이 늘어나길, 그리고 서로를 나누는 선이 삶을 막는 벽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