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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
“좁은 공간이 불편한 게 아니라, 친밀함의 방식이 될 수도 있다”
넓고 쾌적한 공간은 삶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극도로 좁은 땅 위에서도 오랜 시간 살아온 마을들이 존재합니다.
이 마을들은 지형적, 역사적, 정치적 이유로 인해 물리적으로 확장될 수 없는 공간 안에서 놀라울 정도의 적응력과 공동체성을 발휘하며 지금까지 생존해 왔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세계에서 실제로 가장 좁다고 평가받는 마을 3곳을 중심으로, 그 좁은 땅 위에서 이어지는 인간의 생활, 문화, 교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한정된 공간은 불편함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창이 될 수도 있습니다.
1. 크로아티아 ‘훔(Hum)’ – 인구 30명, 세계에서 가장 작은 마을
크로아티아 이스트리아 반도 내륙에 위치한 훔(Hum)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마을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곳입니다.
이 마을의 전체 면적은 약 100m × 30m, 즉 축구장보다 약간 큰 정도의 규모이며, 주민 수는 20~30명 내외입니다.
마을 전체가 하나의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중세 시기의 구조를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성문을 들어서면 바로 마을이 시작되며, 중심에는 교회, 우체통, 가정집, 작은 레스토랑, 기념품 가게, 공동 우물이 전부입니다.
좁지만 단단한 공동체
훔의 특징은 ‘작기 때문에 불편한 게 아니라, 작기 때문에 모든 게 더 가깝고 정직하다’는 점입니다.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 양봉, 전통주 제조(특히 ‘히스타르스카 트라브라키야’라는 허브 브랜디)로 생계를 유지하며, 마을을 방문한 관광객들은 가정집에서 직접 만든 와인, 잼, 수공예품을 구입하거나 식사를 함께 나누는 방식으로 교류합니다.
매년 6월에는 ‘Hum Day Festival’이라는 전통문화 축제가 열리며, 중세 복식 재현, 거리 음악, 마을 전체 만찬이 열려 외지인도 주민처럼 섞여들 수 있습니다.
훔은 그 작음 속에 ‘한 마을이 어떤 최소 조건으로 성립 가능한가’를 보여주는 공간적 실험이자 문화적 상징입니다.
이곳에선 물리적 넓이보다 공동체의 밀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2. 모나코 폰비에이유(Fontevieille) – 초밀집 부촌의 도시 구조
모나코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작은 국가이며, 그 안에서도 폰비에이유(Fontevieille) 지구는 극도로 밀집된 고급 주거 및 업무 지구로, 면적은 약 0.33㎢(330,000㎡)에 불과합니다.
이는 여의도의 10분의 1 정도 크기에 불과하지만, 이 좁은 공간 안에 수천 명의 주민과 수백 개의 기업, 헬리포트, 요트항구, 공원이 존재합니다.
폰비에이유는 1980년대 모나코 정부가 해안을 간척해 조성한 신도시로, 이 작은 땅 위에 고급 아파트, 정원, 스포츠 시설, 미술관까지 갖추어졌고, 지금도 세계 최고가 부동산 중 하나입니다.
어떻게 가능한가?
이곳의 건축 구조는 수직 설계와 다기능 복합 구조가 핵심입니다.
1층은 상업, 2~5층은 주거, 지하엔 주차와 기계 설비가 통합되어 있으며, 모든 공간은 도보 5분 거리 내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건물과 건물 사이 간격은 좁지만, 옥상정원과 테라스를 통해 시각적 개방감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었습니다.
폰비에이유는 좁은 땅에 도시가 어떻게 효율적으로 밀집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이며, ‘공간이 좁다고 불편할 필요는 없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도시 설계의 기능성과 미학을 동시에 추구한 곳입니다.
여행자 입장에서는 걸어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초소형 도시의 모델을 경험할 수 있으며, 바다, 공원, 도시, 박물관이 1㎢ 이내에 집약된 ‘축소판 세계’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3. 일본 나카센도 츠마고주쿠 – 골목길 하나에 펼쳐진 전통 마을
일본 나가노현에 위치한 츠마고주쿠(妻籠宿)는 에도시대 나카센도(中山道) 69개의 역참 마을 중 42번째 마을로, 오늘날까지도 당시의 도로 구조와 가옥 배치를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좁고 긴 마을입니다.
이 마을은 길이 약 600m, 너비는 평균 5~6m 정도의 하나의 골목길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좌우로는 약 30~40채의 전통 가옥이 줄지어 있고, 뒷산은 바로 숲과 이어져 확장이 불가능한 구조입니다.
한 줄로 이어진 삶
츠마고주쿠의 핵심은 ‘좁은 골목 하나로 모든 일상이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식당, 여관, 찻집, 서점, 대장간, 공예점 등이 모두 이 하나의 도로를 따라 붙어 있으며, 모든 이동은 도보로 해결됩니다. 도로엔 신호등도 없고, 자동차 통행도 금지되어 있어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마주치는 속도로 삶이 흐릅니다.
이 마을은 ‘관광지’라기보다는, 실제 주민이 거주하며 운영하는 살아 있는 생활 공간이며, 일본 정부로부터 ‘중요 전통적 건조물군 보존지구’로 지정되어 복원 및 확장 금지 원칙을 고수합니다.
좁지만 단정하고, 작지만 풍요로운 마을 츠마고는, 현대 도시가 놓치고 있는 ‘속도보다 관계가 중요한 삶’의 형태를 보여주는 정갈한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마치며: 작지만 깊고, 좁지만 넓은 삶
세 마을 모두 좁은 공간 안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 안엔 기술, 전통, 공동체, 인간성이 고밀도로 담겨 있습니다.
넓은 공간이 삶의 질을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좁기 때문에 서로를 더 이해하고, 관계가 더 단단해지는 삶의 방식이 존재합니다.
훔에서는 작지만 모든 것이 가까운 삶을,
폰비에이유에서는 첨단의 밀집 도시 설계를,
츠마고에서는 골목 하나로 이어진 전통과 정서를 만날 수 있습니다.
좁은 마을에서 보내는 시간은, 속도를 늦추고 깊이를 넓히는 여정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