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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
“계절이 바뀌면 지도에서 사라지는 마을들 – 그들은 어디로 가는가?”
세상의 대부분 마을은 ‘항구적 공간’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어떤 마을은 그렇지 않습니다.
눈이 오거나 강물이 불면, 바람이 불거나 눈 녹는 계절이 되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마을들’이 있습니다.
이 마을들의 주민들은 단지 그 상황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변화에 맞춰 살아가며, 계절과 함께 이동하는 삶을 선택해왔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실제 존재하지만, 특정 계절에는 지도에서도, 실재에서도 사라지는 마을 3곳을 소개합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자연과의 싸움이 아니라, 리듬을 맞춰 살아가는 삶의 또 다른 방식을 보여줍니다.
1. 인도 마조리 마을 – 빗물로 사라지는 몬순 수몰 마을
인도 동북부 아삼(Assam) 주에 위치한 마조리(Majuli)는 브라마푸트라 강 한가운데 떠 있는 세계 최대의 강 섬 마을이자, 매년 수몰되는 운명의 섬입니다.
면적은 계절마다 다르며, 우기에는 섬 전체 면적의 30~40%가 물에 잠기고, 일부 마을은 완전히 사라지기도 합니다.
마조리는 과거 1,200㎢가 넘는 면적이었으나, 지금은 계속된 범람과 침식으로 300㎢도 채 남지 않았고, 이 중 상당수 마을은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수몰 마을로 존재합니다.
강에 녹아드는 삶
마조리 주민들은 매년 몬순기(6월~9월)가 되면 집을 비우고 더 높은 지대로 일시 이주합니다.
몇몇 가정은 이동식 가옥을 활용하고, 공동체 단위로 축대 위에 임시 캠프를 꾸려 생활합니다.
물이 빠지면 다시 돌아와 무너진 집을 고치고, 농지를 복구하며, 사라진 마을을 ‘재조립’합니다.
이들은 불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강의 주기를 하늘의 뜻, 신이 정한 삶의 시간표로 여깁니다.
축제도, 결혼도, 농사도 모두 강의 범람 주기를 기준으로 계획되며, 일상 자체가 흐름과 침식, 회복과 기다림으로 짜여 있습니다.
마조리는 수몰 위기를 넘어서 기후 적응형 공동체의 전형으로 주목받고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 목록에 등재되기도 했습니다.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오는 마조리의 삶은, 흔적을 남기지 않고 자연에 녹아드는 방식의 생존 철학을 보여줍니다.
2. 캐나다 아이스 레이크 – 겨울엔 사라지는 얼음 위 마을
캐나다 노스웨스트 준주(Northwest Territories)에는 겨울이면 등장했다가, 봄이 되면 사라지는 ‘아이스 하이웨이 Ice Highway’ 위의 마을과 캠프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그레이트 슬레이브 호수(Great Slave Lake)와 그레이트 베어 호수 위에는 겨울철 얼음이 두껍게 얼면 공식적으로 차량 통행이 가능해지며, 그 위에 어업 캠프, 임시 어시장, 순록 관리소, 북극권 중계소들이 생겨납니다.
이 마을들은 모두 빙결된 호수 위에만 존재하는 ‘얼음 마을’로, 매년 3~4개월만 생존하고 나머지 계절에는 완전히 사라집니다.
얼음이 땅이 되는 시간
이 지역 주민들은 ‘이동하는 삶’을 기반으로 하며, 얼음 위에서만 가능한 활동을 집중적으로 수행합니다.
얼음이 녹기 전까지는 생선 건조, 모피 거래, 순록 이동 경로 설정, 생태 조사 캠프 등 지역 커뮤니티의 핵심 활동이 이루어지며, ‘아이스 빌리지’는 그 자체로 북극권 한정 경제와 문화의 중심이 됩니다.
거주지는 대부분 조립식 혹은 텐트형 구조물로 구성되며, 모든 건축물은 얼음의 안전 기준에 따라 배치되고, 이동성·해체 가능성을 고려해 설계됩니다.
이 마을들이 사라지는 방식은 폐허가 아닌 ‘자연으로의 복귀’이며, 다시 겨울이 오면 같은 장소에 다시 같은 사람들이 돌아와 또 하나의 계절을 시작합니다.
얼음 마을은 존재와 소멸이 자연의 리듬에 맞춰 반복되는 순환의 공동체입니다.
3. 일본 시라카와고 오기마치 – 눈에 묻히는 세계유산 마을
일본 기후현에 위치한 시라카와고(白川郷)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눈이 많이 내리는 거주 마을 중 하나입니다.
그중 대표 마을인 오기마치(荻町)는 매년 겨울 4m 이상의 적설량을 기록하며, 강설기에는 마을 자체가 눈 속에 완전히 묻히는 기간이 존재합니다.
마을 전체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갓쇼즈쿠리’ 전통 초가지붕 가옥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초가집 구조는 눈이 자연스럽게 미끄러져 쌓이지 않도록 고안된 독창적인 눈 대응 건축입니다.
눈과 공존하는 마을
오기마치 주민들은 매년 겨울이 오기 전 눈 대응 준비를 철저히 합니다.
지붕 보수, 배수로 점검, 제설장비 배치, 공동 제설조직 운영 등을 통해 눈에 갇히는 시간이 단절이 아니라 축제와 내부 결속의 시간이 되도록 조율합니다.
실제로 강설기가 되면 일부 외부 차량 진입이 통제되며, 주민들은 눈썰매, 설경 트레킹, 눈속 축제 등으로 외부 방문객을 맞습니다.
‘눈 속에서 살아남기’가 아니라, ‘눈 속에서 살아가기’를 선택한 이 마을은 계절의 무게를 오히려 삶의 중심 요소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오기마치는 자연환경에 맞춰 만들어진 건축, 생활 방식, 공동체 운영이 어떻게 세계적인 유산이 될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 마치며: 사라지는 마을이 아니라, 돌아오는 마을
이 세 마을은 지도에서 사라지는 게 아니라, 자연의 리듬에 맞춰 ‘숨을 고르는’ 마을들입니다.
강이 넘치고, 얼음이 녹고, 눈이 쌓일 때마다 사람들은 물러서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계절이 바뀌면, 다시 돌아와 마을을 복원하고 삶을 이어갑니다.
마조리, 아이스 레이크, 오기마치는 존재와 소멸이 동시에 일어나는, 가장 자연스러운 마을의 형태입니다.
그들에게 ‘사라짐’은 끝이 아니라, 다음 계절을 위한 준비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