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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
“땅이 없다고 해서 삶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정착’이란 단어는 대개 땅 위에 집을 짓고, 주소를 갖고, 나무를 심는 삶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 지구에는 육지를 떠나 물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정주 대신 유목을 택한 수상 공동체들이 존재합니다.
이들은 단순히 떠도는 존재가 아니라, 수 세대에 걸쳐 물 위에 터를 잡고, 사회와 문화를 형성하며 살아온 ‘물 위의 민족’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실제로 존재하는 ‘떠도는 수상 유목 마을’ 3곳을 소개합니다.
이 마을들은 땅 없이도 농사짓고, 자녀를 교육하고, 공동체를 유지하는 특별한 삶의 방식을 보여주며, 지금도 기후 변화와 도시화 속에서 유동성과 자율성의 상징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1. 베트남 하롱베이의 플로팅 빌리지 – 물 위의 집, 물 아래의 생계
베트남 북부 하롱베이(Hạ Long Bay)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아름다운 카르스트 석회암 섬들의 집합지입니다.
그 풍경 속에는 수상 위에 떠 있는 실제 마을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콩도이(Cống Đầm), 바항(Ba Hang), 반자(Vung Vieng) 마을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뗏목이나 부유 플랫폼 위에 지어진 수상가옥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이 마을은 단순한 어촌이 아니라, 학교, 시장, 사원, 경찰초소까지 갖춘 완전한 생활 단위로 운영됩니다.
수면 위에 집이 있고, 배가 곧 자동차이며, 그물은 농장이고, 물고기가 곧 화폐인 삶입니다.
삶과 죽음이 모두 물 위에서
이곳 주민들의 주 수입원은 물고기 양식, 굴과 진주 채취, 관광업입니다.
가정마다 물고기 우리를 수면 아래 두고 있으며, 관광객을 위한 보트 투어와 홈스테이 서비스도 운영합니다.
아이들은 수상 학교에 다니며, 수영은 생존 기술이자 일상이고, 결혼식, 제사, 장례도 모두 물 위에서 이루어집니다.
지진이나 태풍이 없는 지역이기 때문에 부유형 수상 구조물의 안정성이 뛰어나고, 최근에는 태양광 패널과 수상 정화 시스템이 도입되어 자급자족형 생태 수상 마을로 진화 중입니다.
하롱베이 수상 마을은 고정된 집이 아닌, 유동적인 생존 공간으로서의 ‘가정’을 실현한 대표적 사례입니다.
2. 필리핀 바자우족 – 바다 위를 떠도는 ‘해양 유목민’
바자우(Bajau)족은 필리핀 남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해역 전반에 퍼져 있는 해양 유목민족입니다.
이들은 ‘씨집시(Sea Gypsy)’라고도 불리며, 일부는 일생의 대부분을 땅에 한 번도 발을 딛지 않고 살아가는 집단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바자우족의 삶의 방식은 이동식 보트 주거, 자급적 어획, 해류와 계절에 따른 수산물 채집 이동이라는 점에서 지속적인 바다 위 유랑을 기반으로 한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몸으로 바다를 기억하는 사람들
바자우족은 어린 시절부터 수영, 잠수, 어획을 배우며, 일부 성인은 산소통 없이 10분 이상 20m 깊이 잠수할 수 있는 폐활량과 신체 능력을 지니기도 합니다.
그들의 눈은 물속에서 시력을 확보하도록 진화했으며, 일부 연구에선 비장 크기가 일반인보다 커져 산소 저장량이 많다는 결과도 있습니다.
이들은 주로 작은 나무배(레파우)에서 가족 단위로 거주하며, 갯벌, 산호초, 얕은 해역을 중심으로 이동하며 생계를 유지합니다.
최근 몇십 년간 일부 바자우족은 육지로 정착했지만, 여전히 다수는 주기적인 물 위 이동을 통한 생활을 이어가며, 정부가 인정하지 않는 ‘무국적민’으로 존재하기도 합니다.
그들의 존재는 국경, 국적, 고정 주거지에 기반한 현대 질서에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유동적 삶의 모델입니다.
3. 나이지리아 마코코 – 도시 한가운데 떠 있는 ‘비공식 수상 도시’
마코코(Makoko)는 나이지리아 최대 도시 라고스의 북동쪽 해안가에 위치한 약 20만 명 이상이 거주하는 거대한 수상 거주지입니다.
이곳은 원래 어부들이 정착한 마을이었지만, 도시 팽창과 이주민 증가로 인해 점점 더 많은 인구가 땅 대신 물 위로 이동하면서 성장한 ‘비공식 수상 도시’가 되었습니다.
마코코의 주택은 땔감 나무 기둥을 강바닥에 박아 만든 수상가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거리는 보트로 이루어져 있고, 상점, 학교, 심지어 교회까지 모두 물 위에 있습니다.
위태롭지만 역동적인 생존
마코코는 공공 인프라가 거의 없는 지역입니다.
전기, 수도, 하수도 시설은 부재하고, 주민들은 비공식 수로망과 자가발전, 우물, 빗물 재활용으로 생존합니다.
정부는 수차례 철거 계획을 추진했으나, 주민들의 조직적 저항과 국제 인권단체의 보호로 지금까지도 스스로 운영하는 ‘물 위의 자율 마을’로 살아남았습니다.
최근에는 현지 NGO와 건축가들이 참여한 ‘수상학교 프로젝트’, 태양광 공동 전력 시스템, 수상 화장실 개발 등을 통해 도시 속에서 소외된 공간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적응형 도시 구조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마코코는 혼잡하고 위태롭지만, 극단적인 환경에서 공동체가 어떻게 질서를 만들고 삶을 지탱하는지를 보여주는 도시적 실험입니다.
🌊 마치며: 떠도는 삶이 불안정한 것만은 아니다
하롱베이의 부유 마을, 바자우족의 해양 유목, 마코코의 자립 수상 도시—이들은 모두 땅 없이 살아가는 법을 익힌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삶은 ‘정착’을 중심으로 한 문명 모델과는 다르지만, 결코 덜 문명화되거나 미완성된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기후 변화, 해수면 상승, 도시 팽창이 가속화되는 시대에,
우리 모두가 직면할 미래의 문제에 대한 유동적, 탄력적, 지속가능한 해답을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땅이 아니라 물 위에 떠 있는 마을들, 그 안에선 삶도, 문화도, 공동체도 가라앉지 않습니다.